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문단 편집) == 의혹과 음모론 == 이런 사건들이 늘 그렇듯 범인이 문세광이 아니라는 주장 등 여러 가지 의혹과 [[음모론]]이 존재한다. 당시 사건 수사 본부 요원으로 현장 검증을 담당했던 서울경찰청 감식계장이었던 이건우는 [[1989년]] 8월에 육영수를 죽인 게 문세광이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범인은 재일교포 출신의 문세광으로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南條世光)였고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라는 이름의 [[여권]]으로 입국하였다. 문제는 이미 문세광은 김대중 납치 사건 때 반한 운동을 벌인 전적이 있어서 중앙정보부의 요시찰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문세광이 가짜 여권으로 한국에 건너왔는데 오사카 총 영사관은 문세광에게 [[비자]]를 내 주었고 이는 모두 중앙정보부에 보고가 올라갔다. 문세광은 사건 당일 조선호텔에서 '서울 2바 1091' 번호판의 [[포드 20M]][* 미국 포드가 아닌 유럽 포드 차량으로, 유럽에서는 당시 Taunus P7.2라는 모델로 팔렸다. 당시 이 차는 [[현대자동차]]가 1968년부터 1973년까지 면허 조립 생산한 적이 있다. 후계 기종은 1978년에 출시된 [[포드 그라나다|그라나다]]. 이후 1986년 7월에 [[현대 그랜저|그랜저]]로 이어진다.]을 타고 나타났는데 특별한 귀빈도 아닌 문세광에게 이런 고급 외제차를 제공한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하지만 후일 이 고급 외제차는 호텔 측에서 불러준 호텔택시였음이 밝혀졌다. 심지어 이 자동차는 '''승차 입장 카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립극장 정문을 그냥 통과'''했다. 또 식장에 출입하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에게 경호관이 가슴에 달아주는 비표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문세광은 남쪽 정문을 통과해서 입장하였는데 남쪽 정문을 경비하던 인력은 [[대통령경호실]] 1인, 경찰관 4인, 행사 안내 요원 3인으로 총 8명이었다. 그리고 '''금속 탐지기가 설치되었음에도 문세광이 어떻게 [[권총]]을 소지한 채 안으로 들어갔냐'''는 것도 의문.[* 당시 중부경찰서 송영기 경감의 말에 따르면 8•15 저격 사건 전날 청와대 경호실 장OO 계장이 중부경찰서로 문세광을 데려와 김원모 중부경찰서장과 최종환 정보과장에게 소개하고 문세광을 검문하지 말고 입장하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이날 식장에는 치안국(현 경찰청)을 비롯해 서울시내 중부, 성북, 성동, 용산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 250명을 비롯해 국립극장 내외에 총 548명의 경찰관이 배치되었고 경호원, 중앙정보부 요원까지 더하면 600여명이 경비하고 있었지만 경호실에서 나온 경호관들 외에는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8.15 기념행사장의 입장은 오전 9시 50분에 완료되었는데 문세광은 행사 직전에 이미 착석했으나 문세광이 비표를 달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 경호실 직원이 문세광을 로비로 내보냈다. 문세광은 23분 후인 10시 13분 다시 입장했다. 이때 경호관이 검문하자 문세광은 자신을 일본대사관 직원이라고 했고 그대로 통과한 후 중부서 정보과장 최정환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문에 아무리 일본대사관 직원이라고 해도 박정희가 참석한 식장에 그렇게 쉽게, 그것도 입장이 다 끝난 상황에서 참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일었다. 문세광을 내보냈던 경호실 직원은 문세광이 여전히 비표도 없이 다시 입장해서 착석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세광의 뒤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것은 문세광이 앉은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있던 맨 뒷자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 있는 경호원을 제외한 모든 경호원은 빠져나오라는 무전이 계속 왔다고 한다. 1963년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때도 총이 몇 발 발사되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재판부 사형언도 판결문에 따르면 문세광은 총 5발을 쐈으며 1발은 오발로 자신의 대퇴부, 2발은 연설대 좌측, 3발은 불발, 4발은 육영수의 우측 두부에 명중, 5발은 국기에 맞췄다고 나와 있다. 반면 이건우는 문세광이 총 4발을 쐈다고 주장했다. 1발은 오발, 2발은 연단, 3발은 태극기, 4발은 천장에 맞췄다고. 하지만 이 5번째 총탄이 문세광이 말한 3번째 불발탄이면 맞아떨어진다. 불발탄이므로 총성이 나지 않은 것.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40609135208571.jpg|width=100%]]}}}|| || 총격을 당해 사망한 장봉화 양. 당시 [[성동글로벌경영고등학교|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 中 장봉화 양 영결식.png|width=100%]]}}}|| || [[성동글로벌경영고등학교|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에서 치러진 장봉화양 영결식. || 하지만 이 시기 많은 이들은 총성이 총 7번 울렸다는 증언을 했다. 1탄은 총을 꺼내다가 오발하여 문세광의 대퇴부에 명중, 2탄은 연단, 3탄은 불발, 4탄은 영부인의 오른쪽 머리, 5탄은 [[태극기]][* 여기까지는 문세광의 주장과 일치한다.], 그리고 6탄은 합창단원으로 참석했던 장봉화 양이 맞았고 7탄은 천장에 맞았으며 추가로 의문의 8탄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3탄이 불발이라 총성이 들리지 않았기에 총 8개의 탄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다만 여기서 6탄(5번째 총성)은 박종규 경호실장이 발사한 오발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박종규의 총은 총을 쏘기도 전에 놓쳤고 경호원이 문세광에게 연단 좌측에서 지향사격을 한 것이 문세광을 빗나가면서 장봉화에게 맞았다는 이야기가 SBS [[그것이 알고싶다]]를 통해서 방영되기도 했다. 심지어 이때 자신이 실수했다는 당시 경호원 최모의 인터뷰까지 방영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out7tIZWe5I)]}}}|| ||<#000> '''{{{#fff [[그것이 알고싶다|{{{#fff 그것이 알고싶다}}}]] '누가 육영수 여사를 쏘았는가' 편}}}''' || 사실 의문은 천장을 도대체 누가 쐈느냐다. 공식적으로는 경호원이 장내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발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무대 전면에서 총을 쏜 사람은 박종규를 포함해서 아무도 없었고 음향 분석에서도 문세광이 제압된 이후에 발사된 총성은 장봉화를 사망케 한 그 총성 이외에는 없었다. 이건우는 이 총탄이 문세광이 제압되는 과정에서 발포된 것으로 추정했다. 문제는 이러면 영부인을 사망케 한 총알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경호실은 이후 현장을 모조리 뒤졌지만 불발탄을 포함해서 6개의 탄자밖에 찾아내지 못해서 2개의 탄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파일:문세광이썼던리볼버증거품.png]] 문세광이 총을 가지게 된 경위도 문제가 많다. 문세광의 총은 일본 경찰서에서 도난당한 2자루의 [[S&W M36]] 권총과 [[미네베아 뉴 남부 M60]]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파출소 도난 현장에서 발견된 족적이나 지문이 문세광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소지하지 않은 뉴 남부의 행방도 문제가 된다. 문세광은 오사카의 한 [[호수]]에 버렸다고 진술했는데 이 총은 호수를 박박 긁었는데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소리 분석[* 하지만 이 방송에서 분석을 담당한 [[숭실대학교]] [[배명진]] 교수는 후일 능력 및 기술에 대해 신빙성 논란이 크게 일어난 사람이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 배명진은 박근혜를 옹호할 정도로 우파 성향에 가까운 사람이라 정치적 성향 때문에 동조할 이유는 없으나 홍보 등 다른 이유로 그런 듯하다.]이나 각도분석 등으로 고의적이 아니고 우발적으로 경호원이 쏜 총알에 [[육영수]]가 사망했다는 주장을 내세워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홈페이지에서 해당편(326회(2005-02-12), 332회(2005-03-26))을 무료로 다시 볼 수 있다. 해당 내용을 요약하면 상단과 거의 같다. 문세광의 뒤에 있던 경호원이 문세광을 제압하기 위해서 총을 쏘았는데 문세광은 이미 제압되면서 쓰러졌고[* 이것도 경호원도 경찰도 아닌 당시 참석했던 일반 서무서 직원이 제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뒤에서 쏜 총알이 빗나가서 영부인이 총탄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한 술 더 떠서 박정희가 평소 육영수와 불화가 있어서 '''이를 기회로 죽게 했다는''' 음모론까지 나왔다. 즉 경호원이 우발적으로가 아니라 계획적으로 육영수를 맞췄다거나 심지어 문세광이 박정희의 사주로 저격 미수를 일으키는 척 하며 처음부터 육영수를 노린 거고 이후 입막음으로 급하게 사형당했다는 것. 하지만 상식적으로 박정희 정도의 권력을 가진 국가지도자가 정말로 정치적 목적이나 사익을 위해서 아내를 제거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자기 눈 앞에서 위험하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실탄이 발사되는 자작극까지 벌이지 않더라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간단하게 누명을 씌워서 쫓아내거나 혼자 있을 때 사고사로 위장해 처리하기만 해도 그만이다.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도 아예 "박정희가 정치적인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자작극을 벌였다"고 꾸며냈다. 제 손으로 아내를 죽여서 전 국민을 북한이 일으킨 테러리즘의 공포에 놓이게 했다는 것. 해당 영화에서는 육영수가 총에 맞아 절명하자 박정희는 안전하게 식장을 걸어 나가다가 뒤를 슬쩍 돌아보고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북한]]의 선전물이 으레 그렇듯 모두 '''거짓'''에 가까우니 그냥 웃어넘기자. 사족이지만 북한은 36년 후 이것과 완벽히 동일한 스토리를 [[천안함 피격 사건/왜곡|자신들이 일으킨 범죄를 덮기 위해 써먹었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차량 문제의 경우 이미 이유가 당시 언론에 보도되었다. 당시 문세광이 타고 온 차량은 '호텔 택시'로, 호텔에 소속되어서 호텔 손님들을 목적지로 데려다 주는 차량이었다. 문세광은 당시 조선호텔에 머물고 있었는데 국립극장에 가기 위해 차량 대절을 요구했으나 조선 호텔에는 이 호텔 택시가 없었다. 그래서 호텔 측은 마침 조선호텔에 온 다른 호텔 택시를 타고 가게 한 것이다. 당시 호텔 택시는 일반 택시와는 달리 택시 캡과 같은 표식이 없고 고급 호텔의 손님을 모시는 특성상 고가의 고급 차량으로 운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문세광의 연기가 합쳐져서 마치 문세광을 고급 차량을 타고 온 귀빈으로 오해하게 된 것이다. 우연의 일치로 당시 문세광이 타고 온 택시는 이후 영화 [[택시운전사]]로 유명해진 '''[[김사복]]'''의 택시였다. 다만 김사복이 동승하지는 않았으며 당시 해당 택시는 일종의 대행 역할을 담당하던 황수동 기사가 운전했다고 한다. 일부 극우는 이를 근거로 김사복이 문세광과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물론 애초에 [[5.18 민주화운동/왜곡/북한 개입설|5.18과 북한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만큼]] 그냥 헛소리라고 보면 된다. 당시 김사복 씨가 실제로 조사를 받았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게 사실이더라도 앞서 언급한 택시 탑승에 대한 단순 [[참고인]] 조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조갑제]]의 보도[[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608100032|#]]에 따르면 홍형[* 이북 출신, 육사, 중앙정보부 10기, 중앙정보부와주일대사관 공사를 오가는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이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부장 이후락) 팀의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